초계 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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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계 변씨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 숙진탁의 후손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변정실을 시조로 하며, 그의 후손들은 장파, 중파, 계파로 나뉘었다. 변요의 후손인 변고적이 밀양에 정착하면서 밀양 변씨로 분적하기도 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 시대의 변옥란, 변중량, 변계량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변효문, 변효경, 변종인, 변계량 등이 있다. 초계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일대의 지명으로, 초계 변씨는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했으며,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015년에는 초계 변씨 53,860명, 팔계 변씨 3,435명, 밀양 변씨 18,750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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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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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초계 변씨 |
한자 표기 | 草溪 卞氏 |
로마자 표기 | Chogye Byeon clan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민족 | 해당사항 없음 |
지역 | 합천군 |
기원 | 해당사항 없음 |
창립자 | (변정실) |
현재 수장 | 알 수 없음 |
해산 | 해당사항 없음 |
폐위 | 해당사항 없음 |
분파 | 해당사항 없음 |
마지막 통치자 | 해당사항 없음 |
마지막 수장 | 해당사항 없음 |
작위 | 해당사항 없음 |
스타일 | 해당사항 없음 |
구성원 | 해당사항 없음 |
관련 인물 | 변영태 변영로 변진섭 변요한 |
관련 가문 | 해당사항 없음 |
특징 | 해당사항 없음 |
전통 | 해당사항 없음 |
좌우명 | 해당사항 없음 |
좌우명 (언어) | 해당사항 없음 |
좌우명 (번역) | 해당사항 없음 |
가보 | 해당사항 없음 |
재산 | 해당사항 없음 |
웹사이트 | 해당사항 없음 |
각주 | 해당사항 없음 |
역사적 정보 | |
시조 | 변원(卞源) |
중시조 | 변정실(卞庭實) |
분파 | 밀양 변씨(密陽卞氏) |
인구 통계 | |
2015년 인구 | 76,045명 |
집성촌 |
2. 기원
변씨(卞氏)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숙진탁(叔振鐸)이 조후(曹侯)에 봉해지고 변읍(卞邑)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변'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이다.[1] 주문왕은 아들 주무왕 희발과 함께 주나라를 건국하였다.[1]
시조 '''변정실'''(卞庭實)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다. 변정실의 세 아들 중 장자 변광(卞光)은 장파(長派), 차자 변요(卞耀)는 중파(仲派), 막내아들 변휘(卞輝)는 계파(季派)로 갈라졌다.
당나라 천보 연간(天寶年間: 742년 ∼ 755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변원(卞源)이 743년(경덕왕 2) 왕명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孝經)」을 가지고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1]
그러나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성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한다.[1]
3. 역사
변광(卞光)의 8세손 변남룡(卞南龍)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변남룡의 아들 변효문은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으며, 변효문의 동생 변효경은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3. 1. 분관
변요(卞耀)의 손자 '''변고적'''(卞高迪)이 밀양에 세거(世居)하면서 '''밀양'''으로 분적하였다. 변고적의 6세손 변옥란(卞玉蘭)은 고려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후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며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5] 변옥란의 아들 변중량(卞仲良)은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로 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변중량의 동생 변계량(卞季良)은 태종 때 예조판서 등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4. 본관
초계(草溪)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일대의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 때 팔계(八溪)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초계로 지명을 고쳤고, 1334년(고려 충숙왕 3년)에 변우성(卞遇成)이 고려 왕실(王室)에 공(功)을 세워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6]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상도 상주목 초계군의 토성(土姓)으로 정(鄭), 주(周), 변(卞) 3성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합천군에 편입되어 초계면이 되었다.
5. 분파
시조 변정실의 아들 3형제에서 변광(卞光)의 장파(長派), 변요(卞耀)의 중파(仲派), 변휘(卞輝)의 계파(季派)로 갈라졌다. 변요(卞耀)의 손자 변고적(卞高迪)이 밀양에 살기 시작하면서 밀양 변씨로 분관하였다.
- 장파(長派) - 변광(卞光)
- 중파(仲派) - 변요(卞耀)
- * 밀양 변씨 - 변고적(卞高迪) - 변요 손자
- 계파(季派) - 변휘(卞輝)
6. 주요 인물
- 고려 시대
- 변옥란(1322년 ~ 1395년)은 고려 충목왕 때 액정내시를 거쳐 예빈시승에 임명되었고, 공민왕 때 진주판관, 전법정랑, 전라도안렴사를 거쳐 1372년 수원부사가 되었다. 우왕 때 판선공시사, 판내부시사를 지냈으며, 충주와 청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공양왕 때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 검교판중추원사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7]
- 변중량(1345년 ~ 1398년)은 이원계의 사위이자 정몽주의 제자이다. 1395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1398년 우부승지, 우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춘당유고》가 있다.
- 변계량(1369년 ~ 1430년)은 변옥란의 막내 아들로, 1385년(고려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태종 7년) 중시에 을과 1등으로 뽑혔다. 세종을 비롯한 태종 3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되자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에 올랐다.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과거 시관으로 공정성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시호는 문숙이다.[7]
- 변효문(1396년 ~ ?)은 한성부 판윤 변남룡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년) 봉상시소윤을 지냈다. 훈련제조, 경창부 윤, 통신사 첨지중추원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오례의주를 상정했으며 신주무원록을 편찬했다. 세종 때 한반도 북쪽의 4군 6진에 거란이 자주 침입하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중국과 거란의 정부 대표들과 만나 담판을 지어 조선의 국경과 변방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 변효경(? ~ 1456년)은 변효문의 동생으로,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 이조참의,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부사로 파견돼 칙서를 갖고 귀국하였으며, 판영흥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사후 세조가 조상하고 부의를 보냈다. 묘소는 장흥에 있다.
- 변종인(1433년 ~ 1500년)은 1460년(세조 6년) 무과에 급제하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관직은 공조판서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장이다.[8]
- 조선 시대
- 변형량(卞亨良)은 변효문의 증손으로, 1501년(연산군 7)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재직 중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 변덕현은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로, 아산 현감 변수림의 딸이다.
- 변성온(卞成溫, 1530년 ~ 1614년)은 호가 호암으로, 조선 중기 고창 출신 유학자이다. 김인후의 제자로, 장성 필암서원을 창건하였다. 저서로 『호암집』이 있다.
- 변성진(卞成振, 1549년 ~ 1623년)은 변성온의 아우로, 김인후와 이황의 문인이다. 학행이 높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 변준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사당은 충청북도 가덕면 시동길 82-11(충경공(초계사))로 이전되었다.
- 변연수는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웠다. 성구사(초계변씨사당,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1길 151, 394-3)에 제향되었다.
- 변시환(卞時煥, 1590년 ~ 1666년)은 1635년(인조 13) 문과에 급제하고 흥덕현감을 역임하였다. 청주의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 변시익(卞時益, 1598년 ~ ?)은 변효문의 6세손으로,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 등을 거쳐 1653년(효종 4) 승지에 이르렀다.
- 변승업(卞承業, 1623년 ~ 1709년)은 역관으로 활동하며 중국과의 중개 무역으로 부를 쌓았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부자'가 변승업의 할아버지로 추정된다.
- 변원규(卞元圭, 1837년 ~ ?)는 1855년(철종 6) 역과에 합격하여 협판교섭통상사무, 지돈녕부사,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 대한민국
- 변상태(卞相泰, 1889년 ~ 1963년)는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 변영만(卞榮晩, 1889년 ~ 1954년)은 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 변영태(卞榮太, 1892년 ~ 1969년)는 제5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3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변희용(卞熙瑢, 1894년 ~ 1966년)은 제4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 변영로(卞榮魯, 1898년 ~ 1961년)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 변옥주(卞沃柱, 1906년 ~ 1962년)는 前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 변정수(卞禎洙, 1930년 ~ 2017년)는 前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였다.
- 변재일(卞在日, 1940년 ~ )은 前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하였다.
- 변동걸(卞東杰, 1948년 ~ )은 제6대 울산지방법원장, 前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역임하였다.
- 변재일(卞在一, 1948년 ~ )은 제7대 정보통신부 차관, 제17·18·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변양균(卞良均, 1949년 ~ )은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을 역임하였다.
- 변재진(卞在進, 1953년 ~ )은 제45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변추석(卞秋錫, 1956년 ~ )은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제23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 변창흠(卞彰欽, 1964년 ~ )은 제5대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6. 1. 고려
변옥란(1322년 ~ 1395년)은 고려 충목왕 때 액정내시(掖庭內侍)를 거쳐 예빈시승(禮賓寺丞)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때 진주판관, 전법정랑(典法正郎), 전라도안렴사를 역임하고, 1372년 수원부사가 되었다. 우왕 때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를 지내고, 충주(忠州)·청주(淸州)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공양왕 때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7]변중량(1345년 ~ 1398년)은 이원계의 사위이자 정몽주의 제자이다. 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398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를 역임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
변계량(1369년 ~ 1430년)은 변옥란의 막내 아들이다. 1385년(고려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태종 7년)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뽑혔다. 세종을 비롯한 태종 3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되자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에 올랐다.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과거 시관으로 공정성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7]
변효문(1396년 ~ ?)은 한성부 판윤(判尹) 변남룡(卞南龍)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년)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지냈다. 훈련제조, 경창부 윤, 통신사 첨지중추원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오례의주를 상정(詳定)했으며 신주무원록을 편찬했다. 세종 때 한반도 북쪽의 4군 6진에 거란이 자주 침입하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중국과 거란의 정부 대표들과 만나 담판을 지어 조선의 국경과 변방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변효경(? ~ 1456년)은 변효문의 동생이다.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 이조참의,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부사로 파견돼 칙서를 갖고 귀국하였으며, 판영흥대도호부사(判永興大都護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사후 세조가 조상하고 부의를 보냈다. 묘소는 장흥에 있다.
변종인(1433년 ~ 1500년)은 1460년(세조 6년) 무과에 급제하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관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장(恭莊)이다.[8]
6. 2. 조선
변옥란(卞玉蘭, 1322년 ~ 1395년)은 고려 충목왕 때 액정내시를 거쳐 예빈시승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때 진주판관, 전법정랑, 전라도안렴사를 역임하고, 1372년 수원부사가 되었다. 1375년(우왕 1) 판선공시사와 판내부시사를 지냈으며, 충주와 청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조선 건국 후 검교판중추원사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7]변중량(卞仲良, 1345년 ~ 1398년)은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이며 정몽주의 문인이다. 1395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1398년 우부승지와 우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거창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춘당유고》가 있다.[7]
변계량(卞季良, 1369년 ~ 1430년)은 변옥란의 막내 아들이다. 1385년(고려 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중시에 을과 1등으로 뽑혔다. 세종을 비롯한 태종 3왕자의 스승이 되었고, 당상관에 올라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되자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서 공정함을 기하여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시호는 문숙이다.[7]
변효문(卞孝文, 1396년 ~ ?)은 한성부 판윤 변남룡의 아들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직제학을 거쳐 1428년(세종 10) 봉상시소윤을 지냈다. 훈련제조, 경창부 윤, 통신사 첨지중추원사로 일본에 다녀왔고, 오례의주를 상정했으며 신주무원록을 편찬했다. 세종 때 한반도 북쪽의 4군 6진에 거란이 자주 침입하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중국과 거란의 정부 대표들과 만나 담판을 지어 조선의 국경과 변방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장자 변심의 딸은 이방원 직계 고손인 이철동의 처, 둘째 변균의 딸(변효문의 손녀)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순창 '귀래정', 수석 취미)의 장자 신홍과 결혼, 장자가 신공제(신숙주가 종조부)1495년 25세 급제,증광시 병과 급제, 과거제 관리감독 '전형', 호조판서, 세자의 스승인, 세자좌부빈객, 동지중추부사, 청백리, 순창 화산서원, 명필. 참고로, 신말주(아들 신공섭)의 11대손이 신윤복, 변상벽이 영,정조 어진, 도화서, 현감제수, 신윤복 부친 신한평과 김홍도도 어진에 참여. 단채 신채호가 후손. 변효문의 둘째 변균의 아들, 변함 또는 변감이, 훈련대장 구문신의 딸과 결혼, 변형량(청년급제, 홍문관)과 딸, 변형량은 갑자사화에 연루돼 효수, 딸(변효문의 증손녀)은 조기 급제한 성균관 유생 이백록(이순신 조부)과 결혼, 조광조에 동조해 기묘사화로 출사 단절. 아들 이정이 아산 현감 변수림의 딸과 결혼, 손자가 이순신. 서울살때 서애 유성룡과 교류.[7]
변효경(卞孝敬, ? ~ 1456년)은 변효문의 동생이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 이조참의, 병조참의, 명에 부사로 파견돼 칙서를 갖고 귀국, 판영흥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하고,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에 책록, 사후 세조가 조상하고 부의를 보냈다. 묘소는 장흥.[7]
변종인(卞宗仁, 1433년 ~ 1500년)은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관직은 공조판서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장이다.[8]
변형량(卞亨良)은 변효문의 증손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있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효수되었다. 아버지는 변감 또는 변함, 어머니는 훈련대장 겸도총관 구문신의 딸이다. 유자광 조카사위인 구세건과 연결돼 조광조 사화에 연루되었다. 이순신 조모와 남매간, 고모 막내아들인 신공제는 1495년 25세에 급제하였고, 5년 후 조카 변형량도 1501년에 급제하였으나, 사화로 단명하였다.[7]
변덕현은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이자, 아산 현감 변수림의 딸이다. 시부 이백록이 조광조에 동조, 기묘사화에 연루돼 출사가 막혀서, 남편 이 정은 무관이었다. 이순신이 서울 건천동(인현동)에서 아산(염치면 백암리)로 옮기게 된 배경에는 아산 현감인 이순신의 외조부 변수림과 장인인 방진이 동향, 아산 염치면 백암리이고, 외숙부와 장인 둘 다 명궁, 무과 공부를 지원한 점이 있다. 변수림의 아들 변오도 명궁이었다. (참고로 변심의 아들 변승종의 아들 변훈남은 청백리였다.)[7]
변성온(卞成溫. 1530~1614)은 호가 호암으로, 조선 중기 고창 출신 유학자이다. 하서 김인후의 제자로, 도학의 근본과 실천에 힘썼다. 금강 기효간, 고암 양자징, 월계 조희문, 영응 이지남, 양보 윤기, 고반 남언기 등 당대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장성 필암서원을 창건하였고, 저서로 『호암집』이 있다.[7]
변성진(1549~1623)은 변성온의 아우로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학행이 높아 참봉으로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7]
변준은 병조판서, 중종반정, 정국공신으로, 경기도 광주에 있던 사당이 이전되어 충북 가덕면 시동길 82-11에 있는 충경공(초계사)이다. 공조정랑 변순(태종)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연안공 변순의 아들 변포는 병사, 변옥곤 아들 '변전'은 첨지를 지냈다.[7]
변연수는 병조판서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워 성구사에 제향되었다. 성구사는 초계변씨사당으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1길 151, 394-3에 있으며, 고려 두문동 72인 중 문하평리 변민과 변연수, 변립부자 3인을 제향하고 있다.[7]
변시환(卞時煥, 1590년 ~ 1666년)은 1635년(인조 13) 문과에 급제하고 흥덕현감을 역임하였다. 청주의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7]
변시익(卞時益, 1598년 ~ ?)은 변효문의 6세손이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장령 등을 거쳐 1653년(효종 4년) 승지에 이르렀다.[7]
변승업(卞承業, 1623년 ~ 1709년)은 역관으로 활동하며 중국과의 중개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부자'가 변승업의 할아버지로 추정된다.[7]
변원규(卞元圭, 1837년 ~ ?)는 1855년(철종 6) 역과에 합격하여 협판교섭통상사무를 거쳐 지돈녕부사, 한성부 판윤으로 명성을 얻었다.[7]
변상태(卞相泰, 1889년 ~ 1963년)는 항일 독립운동가이다.[7]
변영만(卞榮晩, 1889년 ~ 1954년)은 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이다.[7]
변영태(卞榮太, 1892년 ~ 1969년)는 제5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이자 3대 외무부 장관이었다.[7]
변희용(卞熙瑢, 1894년 ~ 1966년)은 제4대 성균관대학교 총장이다.[7]
변영로(卞榮魯, 1898년 ~ 1961년)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 성균관대학교 교수이다.[7]
변옥주(卞沃柱, 1906년 ~ 1962년)는 前 대법관이다.[7]
변정수(卞禎洙, 1930년 ~ 2017년)는 前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다.[7]
변재일(卞在日, 1940년 ~ )은 前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이다.[7]
변동걸(卞東杰, 1948년 ~ )은 제6대 울산지방법원장, 前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다.[7]
변재일(卞在一, 1948년 ~ )은 제7대 정보통신부 차관, 제17·18·19·20대 국회의원이다.[7]
변양균(卞良均, 1949년 ~ )은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이다.[7]
변재진(卞在進, 1953년 ~ )은 제45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7]
변추석(卞秋錫, 1956년 ~ )은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제23대 한국관광공사 사장이다.[7]
변창흠(卞彰欽, 1964년 ~ )은 제5대 국토교통부 장관이다.[7]
6. 3. 대한민국
- 변옥란(卞玉蘭, 1322년 ~ 1395년) : 조선 건국 후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7]
- 변중량(卞仲良, 1345년 ~ 1398년) :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이며 정몽주의 문인이다. 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398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이르렀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춘당유고(春堂遺稿)》가 있다.
- 변계량(卞季良, 1369년 ~ 1430년) : 변옥란의 막내 아들. 1407년(태종 7)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뽑혀, 세종을 비롯한 태종 3왕자의 스승이 되고 당상관에 올랐다.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예조판서·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되자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7]
- 변효문(卞孝文, 1396년 ~ ?) : 세종 때 한반도 북쪽의 4군 6진에 거란이 자주 침입하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중국과 거란의 정부 대표들과 만나 담판을 지어 조선의 국경과 변방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 변효경(卞孝敬, ? ~ 1456년) :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사후 세조가 조상하고 부의를 보냈다.
- 변종인(卞宗仁, 1433년 ~ 1500년) :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이 되었다. 평안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며 변방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관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장(恭莊)이다.[8]
- 변형량(卞亨良): 변효문의 증손. 1501년(연산군 7) 식년시(3년마다 정기) 문과에 병과(10-23)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있다가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효수되었다.
- 변덕현 :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
- 변성온(卞成溫. 1530~1614) : 호는 호암(壺巖). 조선 중기 고창 출신 유학자. 장성 필암서원을 창건하였다. 저서로 『호암집(壺巖集)』이 있다.
- 변성진(卞成振. 1549~1623) : 변성온의 아우로, 학행이 높아 참봉에 제수됐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 변준 : 병조판서, 중종반정, 정국공신. 경기도 광주에 있던 사당은 충북 가덕면 시동길 82-11(충경공(초계사))로 이전되었다.
- 변연수 : 병조판서,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웠다. 성구사(초계변씨사당,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일암1길 151, 394-3)에 제향되었다.
- 변시환(卞時煥, 1590년 ~ 1666년) : 1635년(인조 13) 문과에 급제하고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역임하였다. 청주의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 변시익(卞時益, 1598년 ~ ?) : 변효문의 6세손. 1628년(인조 6)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등을 거쳐 1653년(효종 4년)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 변승업(卞承業, 1623년 ~ 1709년) : 역관(譯官)으로 활동하며 중국과의 중개 무역으로 부자가 되었다.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부자'가 변승업의 할아버지로 추정된다.
- 변원규(卞元圭, 1837년 ~ ?) : 1855년(철종 6) 역과에 합격하여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 변상태(卞相泰, 1889년 ~ 1963년) : 항일 독립운동가
- 변영만(卞榮晩, 1889년 ~ 1954년) : 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 변영태(卞榮太, 1892년 ~ 1969년) : 제5대 국무총리, 3대 외무부 장관
- 변희용(卞熙瑢, 1894년 ~ 1966년) : 제4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 변영로(卞榮魯, 1898년 ~ 1961년) :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한 시인, 성균관대학교 교수
- 변옥주(卞沃柱, 1906년 ~ 1962년) : 前 대법관
- 변정수(卞禎洙, 1930년 ~ 2017년) : 前 헌법재판소 재판관
- 변재일(卞在日, 1940년 ~ ) : 前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 변동걸(卞東杰, 1948년 ~ ) : 제6대 울산지방법원장, 前 서울중앙지방법원장.
- 변재일(卞在一, 1948년 ~ ) : 제7대 정보통신부 차관, 제17·18·19·20대 국회의원
- 변양균(卞良均, 1949년 ~ ) : 제6대 기획예산처 장관
- 변재진(卞在進, 1953년 ~ ) : 제45대 보건복지부 장관
- 변추석(卞秋錫, 1956년 ~ ) :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제23대 한국관광공사 사장
- 변창흠(卞彰欽, 1964년 ~ ) : 제5대 국토교통부 장관
7. 과거 급제자
초계 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
종류 | 이름 |
---|---|
문과 | 변강지, 변계량, 변계손, 변구상, 변삼근, 변시익, 변시환, 변옥, 변응수, 변종헌, 변철산, 변헌, 변형량, 변황, 변효경, 변효문 |
무과 | 변강, 변국필, 변기달, 변끝남, 변덕수, 변동엽, 변동표, 변삼계, 변삼필, 변상규, 변성룡, 변세걸, 변시준, 변엽, 변영식, 변운서, 변유신, 변응현, 변의규, 변이례, 변이명, 변이윤, 변이흥, 변일원, 변존서, 변종남, 변중걸, 변지원, 변지인, 변취하, 변필화, 변항규, 변형, 변호, 변호덕, 변홍달, 변홍정, 변흥벽, 변흥준, 변희전 |
생원시 | 변강지, 변경수, 변관하, 변균, 변기수, 변동좌, 변맹래, 변박, 변벽, 변성진, 변시명, 변시익, 변시회, 변옥성, 변옥순, 변우인, 변우진, 변욱, 변유청, 변유형, 변이보, 변일제, 변제원, 변종하, 변지명, 변충원, 변혁조, 변황, 변효경, 변희눌 |
진사시 | 변강지, 변규, 변대손, 변동규, 변동필, 변백원, 변삼근, 변세언, 변시래, 변시망, 변옥순, 변응몽, 변이보, 변지익, 변헌, 변현문, 변형량, 변홍민, 변홍하, 변훈남, 변희적 |
역과 | 변경식, 변경화, 변광보, 변광서, 변광수, 변광오, 변광우, 변광운, 변광전, 변광진, 변광협, 변광형, 변광호, 변구년, 변구연, 변국신, 변기화, 변덕화, 변동원, 변득규, 변득상, 변명규, 변문규, 변복규, 변봉년, 변봉식, 변삼석, 변삼윤, 변삼적, 변석구, 변석기, 변성연, 변세겸, 변세영, 변세화, 변수민, 변수연, 변수헌, 변숙기, 변승민, 변승업, 변승연, 변승준, 변승택, 변승형, 변시화, 변영석, 변영식, 변용, 변용식, 변우식, 변원구, 변원규, 변윤식, 변은영, 변응성, 변의규, 변이보, 변이수, 변이숙, 변이우, 변이주, 변이창, 변이표, 변이황, 변익, 변정기, 변정로, 변정욱, 변정익, 변정태, 변종구, 변종기, 변종림, 변종섬, 변종운, 변종원, 변종응, 변종헌, 변종환, 변중현, 변중화, 변중환, 변지옥, 변지철, 변지학, 변지항, 변진, 변진화, 변집, 변창화, 변춘식, 변태관, 변태우, 변태희, 변필화, 변학년, 변항연, 변형식, 변효식, 변후규, 변흥기, 변흥숙, 변흥식, 변흥원 |
율과 | 변광규, 변기엽, 변덕윤, 변득호, 변세감, 변세강, 변세박, 변세옥, 변세일, 변세진, 변세호, 변수창, 변용해, 변작, 변정수, 변종수, 변종해, 변학수, 변항운, 변항원, 변흥규, 변흥용 |
음양과 | 변광우, 변광유, 변득수, 변득희, 변승연, 변용규, 변우식, 변종렴, 변종륜, 변창석 |
의과 | 변경태, 변곤, 변긍식, 변대식, 변동식, 변문섭, 변석연, 변수륜, 변수준, 변심연, 변연성, 변엽, 변의풍, 변이형, 변익연, 변정연, 변제식, 변종순, 변종협, 변종호, 변종휘, 변중관, 변지완, 변지원, 변충기, 변태항, 변호, 변홍식 |
음관 | 변영식, 변익래, 변호덕 |
취재 | 변광전, 변대식, 변정연, 변지수, 변지탁, 변지학, 변지항, 변지호, 변태영, 변흥린 |
8. 집성촌
지역 |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
경상남도 합천군 청덕면 앙진리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위양리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봉기동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 |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영하리 |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진정리, 진안리 |
경기도 부천시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암리, 진전면 일암리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전라남도 장흥군 안량면 당암리 |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4] |
9. 항렬자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
口수(洙) | 상(相) | 口섭(燮) 口환(煥) | 재(在) 교(敎) | 口석(錫) 口수(銖) | 태(泰) 영(泳) | 口모(模) 口식(植) | 희(熙) 문(文) | 口준(埈) 口균(均) | 용(鎔) | 口락(洛) 口순(淳) | 정(楨) 주(柱) | 口묵(默) 口옥(沃) | 치(致) 근(根) | 口탁(鐸) | 한(漢) | 口표(杓) | 남(南) | 口중(重) | 일(鎰) |
10. 인구
연도 | 초계 변씨 | 밀양 변씨 | 팔계 변씨 | 합계 |
---|---|---|---|---|
1985년 | 43,669명 | 17,288명 | - | 60,957명 |
2000년 | 49,506명 | 16,911명 | - | 66,417명 |
2015년 | 53,860명 | 18,750명 | 3,435명 | 76,045명 |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초계변씨 草溪卞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학술지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0
[4]
웹사이트
변씨(卞氏) 본관(本貫) 초계(草溪)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5]
실록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1월 23일 무오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6]
실록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초계군
http://sillok.histor[...]
[7]
실록
《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 4월 23일 계사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8]
실록
《연산군일기》 37권, 연산 6년 3월 18일 임신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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